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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기술 및 이론

검도 도입기 이전 한국검술의 양상 - 김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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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도입기 이전 한국검술의 양상 김영학(용인대교수, 검도6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나라의 무도는 갑오경장 이전의 경우 정치적, 군사적 목적이 강하고, 봉건시대 체육으로서 무사훈련의 배경 밑에 대부분 무예를 그내용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의 경우는 구미, 일본 등으로 부터 교육사조를 배경으로한 제조, 유희, 교련 등을 내용으로 하여 행하여 지면서 무사 본위의 체육에서 서민 본위의 체육으로 발전되어 무도와 교육이 합한 성향이 있다. 이러한 무도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수박, 궁술, 창술 등은 세분화되고 현대에 와서는 더욱 더 세분화 되고 있다. 우리나라 검술과 검도에 있어서는 대개 근대 이후 상당부분이 일본검도의 유입으로 발달해 오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검술에 있어서는 그 맥이 이어 오지 못해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전통검도의 소멸에 대해서는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지배하에서 강제로 수용된 일본검도가 우리 고유의 검술의 맥을 끊어졌다는 주장과 이미 그 이전에 신식 군대가 도입되면서 검술은 사라졌다는 다른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전자는 일제시대 일본에 으해 일본 검도가 유입되면서 우리 전통검술의 맥이 끊긴 것이라 하였고, 후자는 신식군대와 근대학교가 유입될 당시에 이미 검도나 검술은 병과(兵科)나 교과목에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검도의 맥은 일제시대가 아닌 그 이전에 사라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글은 우리나라 경기검도 도입 이전인 갑오경장이전 검술의 발달과정을 살펴 우리나라 검도의 체육사적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적 배경속에서 형태와 방법, 의미 등 일반적인 양상의 모습을 규명해 보고, 그 발전유형의 특징은 어떠한지를 살펴보았다.   Ⅱ. 검도도입이전 검술의 모습   검도경기의 발달과정에 따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하여 경기검도인 죽도검도의 유입이전인 1896년이전 검술에 대한 모습을 살펴보았다. 현대 경기화된 검도의 도입이전의 검술은 무사들의 활동인 군사활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는 내용에 있어 군사학(軍事學)에서 다루어야지 체육학(體育學)에서 논의를 한다는 것은 체육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연과학이나 심리학이 철학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체육학의 본질을 군사학이나 민속학에서 찾는 것이 논리적 비약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체육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성의 하나는 체육이 군사활동(軍事活動) 혹은 군사(軍事)적인 목적과 밀접히 관련되어 발전되었다는 박환규의 의견은 본 연구를 수행하는데 있어 국내 검술의 방법과 내용의 접근에 있어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경기검도의 도입이전의 검술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 특징을 상징적 수단, 기예적 수단, 인재등용의 수단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1. 상징적 수단으로서의 검(劍) 기원전 3, 4세기경에 한국에는 청동기문화와 함께 새로운 금속문화가 전래되는데 이것이 한족(漢族)의 철기문화이다. 체육학적인 면에서 이 당시의 쇠로 만든 칼(鐵劍), 세형동검(細形銅劍)등이 발달하여 무술에서도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당시 사회적 구조는 병농일치(兵農一致)에서 농업과 병사가 분리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당시 검을 어떤 방법으로 훈련되고 사용법은 어떠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과(戈)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동과(銅戈)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사용하는 크리스검(Kriss劍)과 유사하다고 하여 '크리스형 동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국내 여러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서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토된 사암제동과용범(砂岩製銅戈鎔范)은 '한국형 동과(韓國形 銅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동과는 그 형태로 보아 도끼, 칼, 낫과 같은 기능을 갖추고 있어 찍고, 베고, 거는 운동형태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음, 전투적인 목적이전에 농경이 생활수단 이었으므로 농사짓는 방법과 함께 사용법에서도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생산공구류나 무기류가 철제로 만들어지고, 복잡해진 생활에 따라 그 기능도 다양해진다. 특히 칼에 있어서는 다양한 형태와 장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시대의 가장 특색있는 형태는 직도(直刀)이면서 대도(大刀 )라는 점이다. 특히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였을분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도니다. 백제의 도검(刀劍)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무비기술(武備技術)수준을 살펴보자. 백제는 도부(刀部)라는 관청을 두어 국방에 소요되는 병장기를 조달하였다. 이것은 전문화된 부서에 의해 군수관리가 말해 준다. 백제의 금속 병장기를 보면, 이 당시 기술수준을 알 수 있다. 대도(大刀)나 대검(大劍) 등의 유물들로 그 흐름이 천안청당동 13호 출토분 환두대도 → 천안 화성리 은상감 환두대도 → 논산 모촌리 5호분 환두대도 → 표정리 고분 출토분 환두대도 → 서천 봉산리 고분대도 순으로 보통 도신(刀身)의 길이가 61cm에서 72cm에 이른다. 그리고 칼자루의 끝을 은제(銀製_의 환두(環頭)로 장식하거나, 나무 판위에 은선(銀線)을 감는 등의 특징이 있다. 칼날은 대체로 직도(直道)의 선형을 이루며, 칼날의 단면은 대체로 이등변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벡제의 특성을 잘 표현한 논산 모촌리5호분의 유물은 단면이 가늘고 긴 모서리 모양을 갖추고 있고, 슴베는 비교적 길어 손잡이부분의 결박에 신경을 썼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칼의 전체길이가 68cm, 폭3.6cm, 두께 0.7cm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를 지탱해 온 것은 실학적 토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실학적 토대는 위기에 처한 시대에 어떻게 대처했었나 하는 병학(兵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그 사료는 미비하나 매시기마다 축적돼 온 국방기술이 있었다. 이러한 국방기술은 무비기술(武備技術)이라고 표현하다. 이러한 무비기술에 대해 박선식은 "우리 겨레의 무비 기술은 상당한 역사성을 지닌다. 그것은 무수히 드러난 각종 출토유물로 입증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추측은 유물뿐만이 아니라 한국사에 전개되는 수많은 전쟁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비(武備)를 다스리는 우리 민족에 대해 유적에서 추적될 수 있는 것은 전남 여수시에 소재한 '오림동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유적은 고인돌의 덮게돌로 알려져 있다. 이 덮개들은 우리의 상무 정신이 어떠한 의식을 지녀던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오림동의 암각화에 나타난 그림에 대해 보면, 두 사람중 한 사람은 간고한 삶이 보다 평안해지기를 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뒤에서 시중드는 듯이 그려진 사람은 일종의 종자(從者)적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앞에 그려진 '칼'은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게 그려진 것이다. 사람들 보다 매우 크게 그려진 칼은 이 당신 '권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당에 꽂힌 듯한 검의 모습은 하늘의 뜻을 땅으로 연결하고 있는 모습으로 신성한 '천의(天意)의 실질적 수행'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타난 칼이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전도(傳導)이고, 벽사적 기능을 수행하며, 사귀진압(邪鬼鎭壓)의 상징물로 표현한 것으로, 하늘이 절대적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천(敬天)사상은 우리 민족에게 하늘에 관련한 문화를 가꾸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소도(蘇塗) 제천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이 소도(蘇塗)옆에는 경당이라는 배움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도에서 문무(文武)을 겸한 교육이 이루었음을 알 수 있고, '칼쓰기(金刃, 術)'부분에 주목하여 보면, '金刃'이란 문자에 있어 '金'자와 '刃'자로 파자도니다. 그러므로 이는 칼날 있는 날붙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도검등의 칼날 있는 날붙이 무기사용기술'이 될 것이다. 날이 선 금속제 병장기의 운용기술의 의미하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칼을 비롯한 모든 인병(刃兵)을 손쉽게 이용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조>의 신화내용에도 칼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고려는 궁중에서부터 참된 상무적 기풍을 유지코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여진이 침입함으로 근신에게 각각 명령하여 유향(油香)과 활 그리고 칼(劍)을 수도 근방의 사찰에 보내 기도하게 하였다는 내용에서 전통적인 도검(刀劍)의 가치성이 고려조에 그대로 승계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구국의식(救國意識)이 도검(刀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이 의식은 오림동의 유적지부터 시작되는 도검에 대한 가치의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란에 임박하여 왕이 내린 명령인 점으로 보아 칼이 지니는 상징성은 공적인 매개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1108년경으로 이 당시 윤관과 오연총의 부대가 여진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한 때로서 당시의 군주이던 예종의 명령 이여진과 같은 침략세력이 없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조의 무인(武人)들이 쓰던 도검이 어떠했는지는 유물로서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유물로는 <고려척경입비도(高麗拓境入碑圖)>가 있는데, 여기서는 고려조의 무인들이 도검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고려척경입비도(高麗拓境入碑圖)를 살펴 보면, 각개 병사들은 도(刀)를 왼족(칼을 휴대한 당사자 기준)허리에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게 휴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칼의 길이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라는 점에서 당병접전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성지역에 있는 노국대장공주의 묘소(정릉)를 통해, 고려의 검(劍)의 모습을 대략 살펴 볼 수 있다. 노국대장공주의 묘소의 옆에 있는 무인석상(武人石像)을 통해 고려조의 검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유물에 대해 석상을 만든이가 추상적윽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조의 실제 도검이 없는 관계로 이 당시의 모습을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후 임진왜란당시 이충무공이 사용하였다고 전해 내려오는 칼은 현재 현충사에 소장되어 보관중인 쌍대환도(雙大環刀)이다. 이 칼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정신수양용 혹은 지휘용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실제 전투목적으로 사용된 칼은 따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쌍대환도는 비록 정신수양용이었다는 주장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매우 특징적이다. 상대환도의 특성에 대해 반선식은 붉은 비운문(飛雲紋)의 경우 붉은 색이 '사악함을 내친다'는 벽사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 비운문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상의 문양과 유사하고, 음각된 사구를 통해 문무겸전했던 충무공의 풍모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쌍대환도가 실전용이라기 보다는 지휘용 혹은 정신수양용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의 도검ㅇ로 파악되는 유물가운데, 육군박물관내의 소장품인 패월도(佩月刀)를 들 수 있다. 패월도는 칼몸(刀身) 및 손잡이, 그리고 칼집 모두 정상적인 상태로 현존하고 있다. 이 칼은 마상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칼의 모양에 나타나는 것 중 칼집이 칼날에 비해 유난히 길다는 것이 특징이 있다. 패월도는 칼날의 길이가 800mm, 손잡이 길이가 244mm, 칼집의 길이는 905mm이다. 즉 칼날의 길이에 비해 칼집은 무려 105mm나 긴 셈이다. 이에 대해 박선식은 의장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궁궐의 절대적 존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신성한 도구인이 칼이 크게 보여 왕권의 신장을 말해준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박선식은 조선후기 도검은 효종때부터 길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문종때의 짧은 도검길이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전투적인 기능이 보장되는 형태로 변경되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바탕이 북벌론(北伐論)이라는 시대의식이 잦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타당성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실전에 필ㄹ요한 조건이 도검의 길이와 많은 관계가 있으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기예(技藝)적 수단으로서의 검술 우리나라 검술에서 그 방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무예제보≫나 ≪무예도보통지≫와 같이 문헌 혹은 그림으로 기재될 것 이외에는 어떠했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다만, 고분벽화나 ≪삼국사기≫등에서 언급한 일부의 내용으로 형태와 검술의 행위적적인 내용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술적 성격을 지닌 그림이나 유물이 보인다. 이것을 보고 고구려 시대에 전개되었던 활동들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예로 창술(槍術), 투호(投壺), 축국(蹴鞠), 수렵(狩獵), 매사냥, 말타기, 씨름, 수박(手拍), 활쏘기(騎射, 步射), 무용(舞踊(群舞, 劍舞)), 검술(劍術), 교예(巧藝(말타기 재주, 손재주, 발재주, 칼부림 재주)), 장기 등이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종목들은 주로 무기류를 취급하거나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한 연습으로 외적에 대항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검술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는 안악 제3호분과 팔청리분이 있다.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 등장하는 사람은 대략 250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의장병, 호송 인물, 행렬 사령관인 듯한 말을 탄 관원, 마부, 검무를 추는 사람, 등롱수, 부월수, 궁전수, 악대 등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본다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당시 고구려 최고 권력을 지닌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외에도 1949년 발견된 안악 제 1호분을 조사, 정리하던 과정에서 고분 1기가 더 발견 되었다. 1949년 5월 19일부터 안악 2호분 발굴에 착수한 2호분에는 주인공의 생활 풍습이 나타나며 여인 및 아동군상도와 주인공의 묘실을 수호하는 무인, 주인공의 정신 생활의 면모를 보이는 비천도 등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졌다. 특히 안악 2호분 남벽 무사도에는 현실 입구에서 바로 나오는 연도 좌우벽, 남벽, 좌우벽에 수문장을 각각 1명씩 그렸다. 차양이 둘려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다. 왼손에 긴 환도집을 쥐었으며, 오른손으로 칼을 뽑을려는 자세이다.이 장면의 경우는 투구를 착용하고 왼손에 환도를 들었다는데서 오늘날의 검법유형과 유사한 발도(拔刀)의 자세가 있다. 또한 팔정리 고분벽화에 나오는 교예도(較藝圖)를 보면, 두사람이 격검(擊劍)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팔청리분에 나타난 다양한 무예 그림을 살펴보면, 긴칼을 찬 사람은 오른손에, 다른 사람은 왼손에 칼을 쥐고 오른손에 칼을 든 사람은 무릎을 굽혀 이마에 손을 얹어 상대을 겨누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한손으로 칼을 들어 올리고 다른 한손을 뒤고 뻗쳐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자세는 조선후기의 문헌인 ≪무예제보(武藝諸譜)≫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타나는 검법과는 다르며, 오늘날 펜싱(fencing)의 방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벽화에는 검술이외에 다양한 곡예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다양한 곡예와는 달리 중국으로 부터 들어온 외국인 곡예사로 추측되어진다. 또한, 안악 제3호분에는 환도를 든 무사(武士)가 있으며, 검무와 유사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검(劍)을 무사들이 소지하기도 하였으며, 이미 이 당시에 검무(劍舞)도 조재해었다는 것의미한다. 신라의 경우에는 검술에 대한 기술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나타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의 <김유신조>에는 홀로 劍을 들고 咽薄山의 깊은 溪覺에 들어가, 燒香하고 告天하였으며 中嶽 때와 마찬가치로 誓辭를 세워 祈禱하였다. 天官이 光을 내려 靈이 寶劍에 내렸다. 3日째의 밤에는 虛星과 角星이 光芒이 赫然하게 아래로 드리워져, 劍이 스ㅡ로 動搖하였다라고 하여 내용적인 면에서 상식이외의 내용이지만, 김유신이 검을 수련하기 위하여 하늘에 기도하고 검(劍)과 하늘의 조화를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검술의 수련과 정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김유신의 검술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斷石山 혹은 月星山이라 하는데 慶州의 西方 23리의 곳에 있다. 諺傳 에 의하면, 金庾信이 高句麗와 百濟를 征戊할 뜻을 품고 神劍을 들고 月星山의 石窟에 들어 갔다. 거기에서는 그는 劍을 硏磨하고 大石을 짤랐음으로(鍊劍試斷大石) 짤라 진 돌이 山처럼 쌓였다. 지금도 그 돌들이 남아 있다. 그 밑에 寺를 짖고 斷石이라 불렀다 라고 하여 김유신이 검(劍)으로 큰돌을 잘랐다는 내용과 이를 위하여 노력을 한 것과 실재로 경주에 단석사라는 절이 남아 있는 점으로 ㅂ아 김유신이 검술훈련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사료되며, 큰돌을 자르는 것에 대해 상상이외의 표현을 한 것을 수련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큰 돌을 자르는 수련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물로 보아 직도(直刀)의 검(劍)보다는 대도(大刀)가 많은 것으로 볼때, 검법(劍法)의 변화도 찌르고 치는 것에서 베는 기법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특히 김유신이 "큰돌을 잘랐다(試斷大石)"라는 내용을 볼 때, 검술의 형태적인 면을 2ㅗ면 절단(切斷)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유신의 검술은 베는 기술인 도법(刀法)으로 사료된다. 즉 베는 연습을 하였던 기록으로 이 당시의 검술은 도(刀)를 사용한 베는 기법이 포함되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가야의 옛 고분에서 드러나는 많은 철제품은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많은 도검류를 볼 때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칼쓰기에 남다른 기술도 지녔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면 가야인들이 뛰어난 칼쓰기의 맥을 신라에 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관한 대표적 인물들은 문노(文弩)와 김유신을 들 수 있는데, 문노는 가야국 문화(文華)공주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칼쓰기 의 달인이었고, 의로운 기개를 숭앙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야가 신라를 배반하여 출정하게 되었을 무렵, 문노는 가야로의 출정을 끝내 거절하였다. 이로 보아 문노의 마음 속에서는 가야인의 무혼이 맥맥히 숨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노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노역시 호걸로 격검을 잘했다. 공이 사다함에게 격검을 배우게 했다.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하고 의기를 좋아 했다. 라고 하여 문노는 격검(擊劍)을 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화랑세기≫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호림(虎林)의 경우 "公多勇力好擊劍早入文弩之門(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해 일찌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와 "斯多含十二能擊檢愛人(사다함은 12세에 격검에 능하고 사람을 사랑하였다)"라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노의 문하에 호림과 사다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문노에게 격검(擊劍)을 배운 제자라는 점에서 검술을 지도하고 배우는 사제(師弟)관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향한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해 신라의 8세 풍월주에 오르게 된다. 그 후 풍월주로서의 문노는 신라 무사이념을 추수리는데에 큰 업적을 남겼고, 문무를 겸전하는 무인(武人)의 기풍을 확산시켰다고 한다. 이 밖에 문노는 신라에 '칼쓰기 문파(門派)를 이루게 한 업적을 세웠고, 그의 문하에 호림(虎林)과 사다함(斯多含)같은 칼쓰기 무사들이 배출된 점은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이러한 문노의 행적으로 보면, 가야인들의 칼쓰기 실력이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야는 그 후에 신라에 정복당하였으나, 가야는 금속관련 기술과 뛰어난 칼쓰기 등 병학(兵學 )과 기예(技藝)에 관련한 상당부분의 문화를 신라에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는 삼국이 대립하고 있었던 만큼 국방체육(國防體育)으로서의 무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한국적 무사도(武士道)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화랑제도가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백제의 내용에 있어, 중국의 사서(史書)인 ≪주서(周書)≫에는 무기에 활, 화살, 칼, 창이 있으며, 사람들은 기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백제는 기사(騎射)를 중시한 내용이 있으며, 무기에 있어서도 칼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칼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화랑들이 검술을 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본국검법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화랑의 존재는 한국무예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화랑에 대해 ≪화랑세기(花郞世紀)≫서문(序文)에는 화랑제도의 기원이 신궁(神宮)의 제사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의식의 집행자가 처음에는 여성이었으나, 후에 남성으로 바뀌었고, 처음에 신궁에서 신만을 받드는 행사가, 후에는 시대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사회 교육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등용시키는 인재 등용 기관으로 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는 "화랑은 볼래 살고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 곧 그때의 선비라 청했는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粗衣)를 입어 조의선인(粗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해 화랑이라 하였다다"고 하여, 화랑의 기원을 소도 제단의 무사에서 찾았다. 화랑들의 검술에 있어 검술 이외에도 검무(劍舞)에 대한 특징이 이쓴데, 이 당시에 한반도에 이미 무무(武舞)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련과정에 있어 혹은 제의(祭儀)의 사이에 무기를 들고 춤추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사료가 없는 관계로 밝힐 수는 없다. 고려시대의 검술에 대해서는 사료미비로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강무제(講武制)가 있었음을 조선조의 <세종실록(世宗實錄)>권 30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강무의 법은 오래되었으니, 고려때에 이미 있었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도 역시 전해진 것이다. 이것은 고려때 강무(講武)를 통해 검술을 수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유교적 통치이념이었던 이 시기의 특성상 통치, 군사적인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당싱에 다른 무예들과 더불어 검술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이 당시의 병농일치제도와 국민개병제에 따라 모든 국민은 각종 무예를 익혀야 했다. 평상시에도 무예를 습득하도록 강요되었고, 병장기 휴대를 국민의 의무로 정하고 있었음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당시에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체제가 효력을 거두지 못하고, 임진왜란 이후에 군사에 정예화로 변하였다. 이에 대해 나영일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병농일치의 국방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정예한 무사들을 양성하는 국방정책으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라고 하여 "병농일치에 의한 무예의 대중화에서 전문화로의 변화"로 이 당시의 무예에 대한 변화를 압축하여 주장하였다. 검술에 있어서는 조선초기의 경우는 1419년 대마도 정벌에 앞서 전형적인 전투기법인 격자기술(擊刺技術)이 있었던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박선식은 "조선군의 무기체계는 고려말의 화기개발에 힘입어 중화기를 갖추고 있었지만, 대마도 정벌전은 상륙전 위주의 도벌인 점을 주목해 창검(槍劍)에 의한 근접전이라는 전투양상, 즉 재래식 전투 기업인 격자기술(擊刺技術)이 있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투양상을 띤 기술은 세종때의 창검에 관련된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검술에 있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조>에 언급된 창검(槍劍)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 당시의 분위기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대마도정벌이후, 세종때는 창검전을 위한 작업이 계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이미 대마도 정벌당시의 경험했던 일본이들의 검술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이 칼을 소지하고 수많은 유파의 검술들이 있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경험한 조선초기의 병사들에게는 더욱 필요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3)인재등용의 수단으로서 검술 무예를 통한 인재등용은 무예의 기량을 연마하기 위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그것은 기마술(騎馬術)이라든가 여러 무예시취종목이 단시간내에 숙달되지 앟는 기술에 구성되어 있다는데 추측할 수 이싸.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는 조선조의 교육형태를 크게 유학교육(儒學敎育), 무학교육(武學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으로 구분하여, 문치주의(文治主義)경향으로 무학(武學)을 비롯한 기타 교육이 열등한 시대였다. 그러나 과거제도에서 문과의 경우 준비기간이 20-30년이 소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사가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文科)와 같이 이론을 비롯한 무과의 특성인 무술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학(武學)교육에 바친 준비시간은 적계 소요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대사회에서는 무예(武藝)로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전투적인 생활이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무(武)적 기예를 가진자가 인재(人才)로서 시대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국유사(三國遺事≫<김유신조>에서는 18歲가 되어 劍術을 修得하여 國仙이 되었다 라고 하여 김유신이 어린나이에 검술훈련을 터득하여 화랑의 국선(國仙)이 되었다는 것은 검술을 터득하면 관료조직에 오를 수 있다는 인재등용의 한 예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물론 이 근거만을 가지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검술이 최고의 기술, 즉 현대적인 해석으로 최고의 무기였다는 점에서 강조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검술의 평가기준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한 관계로 설명할 수 없지마, 이 당시 화랑도의 수련방법이 "惑相磨以道義 惑相悅以歌樂 遊娛山水 라고 한 기록을 살펴보면 많은 내용을 내포한 검술수련의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惑相磨以道義'라는 것은 씨족의 전통과 신앙은 숭배하면서 상호부조, 화합단결하는 사회정의를 연마(鍊磨)-체득(體得)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화랑이 이성적인 슬기를 터득하여 그 사회에서의 우수한 엘리트로서의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데 그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惑相悅以歌樂'이라 함은 원시사회에서 공동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가무(歌舞)적인 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도 도의(道義)연마와 연관이 있으며, 이방법을 통하여 서로의 우정과 집단의 공동 의식을 도모하고, 엘리트로서의 수양을 토대로 보다 더 예술적인 정서적 훈련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遊娛山水'는 내 나라와 멀고 가까운 명산(名山)과 큰천(大川)을 두루 돌아 다녀 국토와 대자연에 끝없는 애착심을 갖게 함이다. 그런데 간혹 화랑의 '遊娛山水'를 화랑도운동 사상 후대적인 혹은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려는 주장도 있다. 즉 孫晋泰'는 삼국 통일 이후 평화시대의 문익(文溺)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놀고 먹는 유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시 사회에 있어서의 성지순례(聖地巡禮)라는 신성한 종교적인 기능을 가졌을 가능성과 전쟁을 대비한 지형습득의 교육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을 보면, 이러한 수행을 하는 화랑도는 그 교육의 최종적 목표가 국가에 필요한 인재 양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검술은 이 다시 군사적 교육과정으로 볼 수 있고, 화랑제도가 신라의 지도 측에 속하는 특수 인물의 선발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인재등용이 무(武)를 기준으로 행하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이후 유학(儒學)에 바탕을 둔 문치주의(文治主義) 통치방식이 정착되면서 무예보다는 문예(文藝)에 의한 인재등용방식이 선호되었다. 신라의 독서삼품과(獨書三品科)가 그러한 예고, 고려(高麗)에서는 유교이념(儒敎理念)에 따른 체제정비(體制整備)가 이루어지면서 과거(科擧(光宗9年:958))가 실시되었으나, 이 때 무과(武科)는 실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한때 예종(睿宗 4年(1109))에 관학부흥책(官學復興策)의 일환으로 국학칠제(國學七齊)를 설치할 때 강예제(講藝齊)를 두고 무사(武士)를 양성코자하였으나 결국 공식적인 제도로서 무사시취제도(武士試取制度)는 조선 왕조이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조에 접어들어 국민개병제라는 징병체제(徵兵體制)를 유지하면서 지휘관 및 기관병을 확보키 위하여 무과(武科)를 비롯한 무사시취제도(武士試取制度)를 실시하였다. 조선왕조는 그러한 징병체제위에서 무과(武科)를 비롯한 무사시취(武士試取)의 제도를 비롯한 무사시취제도(武士試取制度)법제화시켜 이제도를 400여년간 지속하여 시행해 왔다. 이 무사시취제도는 법제화된 것으로 여기에 근거한 검술의 유형 및 시취과목으로 적용된 범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잇다. 이 시취제도이전에도 검술이 인재등용에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적용해야 하지만, 법제화된 근거를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에 교령(敎令)과 조례(條例)를 계속하여 모아 편찬한 책으로 조선 영조(英朝)22년(1746)에 왕명으로 김재로(金在盧)가 편찬한 ≪속대전(續大典)≫에는 각도(各道)의 별무사(別武士)의 도시(都試)에 있어 육기(六技)에 대한 시험을 치룬 자료가 있다. 4종인 살수(殺手)의 유형에는 "월등한 성적을 받는 자는 겸사복(兼司僕)의 급료(給料)를 준다. 월도(月刀), 쌍검(雙劍), 평검(平劍), 제독검(提督劍), 권법(拳法) 중 일예(一藝)로 시험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월도, 쌍검, 평검, 제독검이 시험종목으로 그 중에서 하나를 시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창(騎槍)에 대한 기록에 '용세구자(用勢具者)'라는 부문에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검술에 있어서도 자세가 중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검술에 있어서도 자세가 중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속대전(續大典)≫ 이후에 만든 ≪대전통편(大典通編)≫과 ≪대전회통(大典會通)≫의 내용은 약간의 보충적 이고 수정된 내용만이 담겨져 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보이는 시취내용중 특별히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과 차이가 나는 내용은, <권무재초시(勸武才初試>의 시험과목이 관혁(貫革), 유엽전(柳葉箭), 조총(鳥銃), 편추(鞭芻)에서 기창교전(騎槍交戰), 편추(鞭芻), 마상언월도(馬上偃月刀)(이상은 장교(將校)와 기병(騎兵)), 조총(鳥銃), 용검(用劍),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언월도(偃月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본국검(本國劍), 예도(銳刀), 목마창(木馬槍), 당파(螳把), 낭선(狼先), 등패(藤牌), 권법(拳法), 보편추(步鞭錐), 협도(狹刀), 봉(奉), 죽장창(竹長槍)(이상은 보병(步兵))의 21가지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편찬된 1970년보다 5년 앞서 만들어진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이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내용이 실지로 법제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서무사시취방(關西武士試取榜)≫은 정도 16년(1972) 평안도관찰사 홍양호(洪良浩, 1724-1822)가 도내(道內)의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하고 이를 보고한 장계 및 진교의 등본이다. 이 방(榜)에는 정조(正祖)가 관찰사 홍양호(洪良浩)에게 명하여, 평안도는 무를 숭상하는 지방일 뿐만 아니라 무기를 권장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 도내의 당해 지방관으로 하여금 도내 무사에게 철전(鐵箭), 유엽전(柳葉箭), 기추(騎芻), 무경(武經)등을 시험하여 다 통과한 자에게는 상(賞)을 내리고 그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있고, 홍양호는 각각 그 이름아래에 신수(身手), 지처(地處), 여력(黎力), 기예(技藝) 등ㅇ 여러가지 시험결과 보고사항이 나와 있다. 그리고 우수자를 경시(更試)하여 전시(殿試)에 보내거나 시상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입격(入格)한 177명중에 겸기(兼技)한 사람 2인(한량), 철인 49인(출신 11인, 한량 38인), 유엽전 79인 (출신30인, 한량 49인), 기추 15인(출신 6인, 한량 9인), 무경(출신 8인, 한량 22인), 기예 1인(한량)인데 이중 출신(出身)은 55人, 한량(閑良)은 152人 이었다. 원래 시험의 기준은 철전(鐵箭) 140, 150, 160 보(步), 유엽전(柳葉箭)은 삼중사분(三中四分), 사중사분(四中四分), 오분(五分), 기추(騎芻)는 사중(四中), 강서(講書)는 삼(三), 사(四), 오책(五冊)을 구통(俱通)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중 원기(原技)한 다음 3명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고 뒤에 등용(登用)시켰다. 기예(技藝)의 등급도 있는데 오직 한명만이 시상을 받고 있다. 평양한량 전응린(田應隣)은 월도(月刀)가 상상(上上), 편추(鞭芻)가 육중(六中)으로 전시에 직부되고 있다. 그리고 의주한량 허홍(許泓)은 철전과 기예를 함께 시험보았으나, 철전만 입격하고 기예는 불합격하였는데 기예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쌍검(雙劍)이 중상(中上), 이화창(梨花槍)이 중중(中中), 월도(月刀)가 중하(中下)였다.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출신과 한량을 막론하고 마첩이나 대목 등의 시상품보다 전시에 직부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명예고 상당한 이익이라는 것이고, 시험과목에서 월도(月刀)와 쌍검(雙劍)이 있어 중요한 종목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무예서(武藝書)에 나타난 검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무예서로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주를 이루는 한교(1555-1627)의 ≪무예제보(武藝諸譜)≫가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로는 최초의 것이다. 이 무예서는 조선의 선조 27년(1594)에 훈련도감이 설림되어 당시 한교가 지휘사령의 직책으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번역을 바탕으로 중국의 병사들이 조선에 방문하여 직접지도한 내용과 각종 중국의 군사자료를 바탕으로 1598년에 완성된 것이다. 중국의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 14권중 4권에 해당하는 <단기장용해(短器長用解)>는 1561년에 위관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일본의 영류도법과 위관대책이 있어 유리한 당비의 훈련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조선의 고위 무사들에게 큰 참고가 되어 한교는 그 내용을 그대로 ≪무예제보(武藝諸譜)≫에 6수록했다. ≪무예제보≫에는 많은 부분이 기효신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나, 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닌 한교자신의 의견과 조선의 군대훈현에 필요한 기술을 첨가하고 있다. ≪무예제보≫는 당시 중국 군대의 훈련방법을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이 ≪무예제보(武藝諸譜)≫를 중심으로 조선의 군대는 훈련되어졌다. 결국 중구과 조선의 군사무술교류상 현존하는 최초의 무예서는 ≪무예제보(武藝諸譜)≫라 할 수 있다. 영조 35년(1759)에는 ≪무예제보(武藝諸譜)≫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한교의 ≪무예신보(武藝新譜)≫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한교의 ≪무예제보≫를 기초로 하여 조선의 18반무예의 기초를 이룬 것읻. 한교의 ≪무예제보(武藝諸譜)≫에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기 가지는 1960년의 간격이 생긴다. ≪무예제보(武藝諸譜)≫에는 12종류의 무술기법이 숡되어 있으나, 이 중에서 검술과 관련된 것은 예도, 왜검, 교전월도, 협도, 상검, 제독검, 본국검과 같은 7가지의 형태이다. 이중에서 왜검과 교전월도는 일본에서 전재힞ㄴ 것이고 본국이 조선의 도법이며, 예도, 협도 쌍검, 제독검은 중국에서 전해지 것이다. 정조 13년(1789)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재되어 있는 무예의 내용중,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 왜검(倭劍), 교전이고, 조선의 것은 본국검, 이외의 21종류는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 당시 무예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변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예서라 할 수 있는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에 나타난 검술의 유형을 살펴보면, ≪무예제보≫의 경우 ≪기효신서≫에서 얻은 여것개의 기술(六技)중 검술에 해당하는 것은 쌍수도(雙手刀)가 있고, ≪무예도보통지≫에는 예도(銳刀), 상수도(雙手刀), 월도(月刀), 협도(狹刀), 마상월도(馬上月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왜검교전(倭劍交戰)이 나오고 있다. 이는 24가지 무예중에서 10개의 각종 기예가 도(刀)와 검(劍)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이 당시부터 도검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刀)는 상수도, 예도, 월도, 협도, 마상월도가 있으며, 검(劍)은 왜검, 제독검, 본국검, 상검, 마상쌍검이 해당된다. 이상과 같이 무예서(武藝書)에 나타난 검술은 중국의 문헌을 참고로 재구성된 것으로 우리의 검술은 '본국검'만이 존재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국검법에 대한 ≪무예도보통지≫의 자료이전의 근거는 찾을 수 없어 발생의 기원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당시 무예서에 나타난 검술의 대부분이 중국의 것이고, 왜검과 같이 일본의 것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검술형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갑오경장이전 검술의 양상   1)형태 경기검도도입이전의 도(刀)와 검(劍)은 살생용과 상징용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으며, 경기검도도입이후의 경우는 스포츠경기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경기검도도입이후의 경우는 스포츠경기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경기검도 도입이전의 형태를 보면, 청동기 시대의 세형동검과 석기시대의 마제석기와 같은 기능은 상징성뿐만이 아니라, 전투적인 목적이전에 농경이 생활수단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 후 삼국시대의 철재문화가 형성되면서 생산공구류나 무기류가 다양한 형태와 장식을 시작해 직도(直刀)이면서 대도(大刀)라는 점이 특색이 있다. 백제의 경우 도부(刀部)가 있어 전문화된 부서에 의해 도검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도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으로 도검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경우 직도(直刀)를 사용한 <고려척경입비도(高麗拓境入碑圖)>에 나타난 형태의 경우, 곧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게 휴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칼의 길이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중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형태의 도검기가 유입되었고,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보이는 시취에 사용되었다는 용검(用劍),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언월도(偃月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본국검(本國劍), 예도(銳刀)등의 다양한 도검기의 유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방법 검(劍)과 도(刀)의 형태에서 따라서 그 기술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제작되고 변화되어 왔다는데서 생각해 볼 수 잇다. 검(劍)에서 도(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를 기점을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때 검술의 형태는 찍고, 베고, 거는 운동형태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劍舞 )가 신라에 전재하였다는 것은 검술에 대한 기량이 이 당시에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경우 직도(直刀)가 칼의 길이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라는 것은 단병접전용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직도(直刀)의 경우 베는 기술이 없을 것 같지만, 이 당시 유물을 놓고 최근에는 베기에 용이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의 유물에 나타난 검술의 형태들은 무기류를 취급하거나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한 연습으로 외적에 대항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팔정리고분벽화에 나오는 교예도(較藝圖)에는 직도(直刀)를 사용한 격검의 모습이 있으며, 가야의 옛 고분에서 드러나는 숱한 철제품은 철기문화가 발달 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무수한 도검류를 볼 때 도간을 비롯한 많은 전사들은 칼쓰기에 남다른 기술도 지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초기 1419년 대마도 정벌에 앞서 전형적인 전투기법인 격자기술(擊刺技術)이 있었다는 문헌이 있었고, 조선시대의 경우,≪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창(騎槍)에 대한 기록에 '용세구자(用勢具者)'라는 부문에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검술에 있어서도 자세가 중요했던 것을 추측된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보이는 시취내용에는 용검(用劍),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언월도(偃月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본국검(本國劍), 예도(銳刀)와 같은 검법이 나오며, 무과시취에 있어 기예(技藝)의 등급도 있어 검술의 평가기준이 있어음을 알 수 있다. ≪무예제보≫의 경우 기술(六技)중 검술에 해당하는 것은 쌍수도(雙手刀)가 있고, ≪무예도보통지≫에 등장하는 각종 도검기는 쌍수도의 경우 원래 장도(長刀), 요도(腰刀)이며, 예도(銳刀)는 원래 단도(短刀)를 의미하나, 이 당시에는 환도(環刀)를 사용하였다. 왜도는 장도(長刀)로서 패도(佩刀)라고도 하며, 제독검(提督劍)은 예도와 유사하였고, 본국검(本國劍)은 예도(銳刀)와 같은 요도(腰刀)를 사용한 것이며, 쌍검(雙劍)은 가장 짧은 요도를 선택하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상쌍검(馬上雙劍)은 쌍검(雙劍)과 같은 요도(腰刀)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전투적인 용도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용도 현대 경기화된 검도의 도입이전의 검술은 무사들의 활동인 군사활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검(劍)은 경기검도의 도입이전의 경우는 상징적 수단, 정신적 수양, 그리고 살생용으로 구분할 수있으며, 경기도입기경우에는 교육적 수단, 체력단련수단인데 비해 해방이후에는 경기적 수단과 수련적 수단으로 변하였다. 경기검도도입이전이기의 모습을 보면, 백제의 경우 칼자루의 끝을 은제(銀製)의 환두(環頭)로 장식하거나, 나무 판위에 은선(銀線)을 감는 것은 지배자나 지배계층의 상징적 의미가 강하며, 오림동의 암각화에 나타난 그림과 같이 '권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칼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점이 있다. 이러한 도검의 가치성은 고려조에서도 전란에 임박하여 와이 내린 명령인점으로 칼이 지니는 상징성은 공적인 매개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당시 이 충무공이 사용하였다는 쌍대환도(雙大環刀)는 실전용이 아닌 정신수양용이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 후기의 패월도(佩月刀)궁궐의 절대적 존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신성한 도구인 이 칼이 크게 보여 왕권의 신장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격검(擊劍)의 경우는 실전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당시 삼국시대는 삼국이 대립하고 있었던 만큼 실전적 검술도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화랑의 검무(劍舞)는 수련과정에 있어 혹은 제의(제의)의 사이에 무기를 들고 춤추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조선조에는 전쟁을 대비한 검술의 실전적 교육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Ⅵ. 결론 이상과 같이 한국에서 경기검도도입이전을 살펴 보기 위하여, 이를 위해 한국의 역사적 배경속에서 검술의 시대별 형태와 방법, 의미등 일반적인 양상의 모습을 규명해 보고, 그 발전유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갑오경장이전 검술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 기예적(技藝的), 인재등용, 무예서(武藝書)수단으로서 시기로 이 당시의 명칭은 검술, 검법, 격검(格劍)으로 불리었으며, 치고 지르는 방법인 격자법(擊刺法)을 사용하였다. 이때의 검술은 상징(象徵), 기예(技藝), 인재등용(人才登用), 무비(武備)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용구에 있어서는 진검(眞劍)이라 할 수 있는 도검(刀劍)을 사용하였으며, 기술의 대한 판정은 주관적이었다. 이러한 검술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자생된 각종 검술이 복합적으로 산재되었던 실전(實戰)적 검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民族文化推進會 (1996). 新增東國輿地勝覽③, 卷21. 慶州府, 솔 朴歡圭(1990). 朝鮮前期 體育史硏究(1), 韓國體育大學論文集 13集 孫晉泰(1948). 朝鮮民族史槪論, 乙酉文化史 申采浩(1980). 朝鮮上古史, 삼성문화미술재단 辛鎬烈 譯(1991). 三國史記Ⅱ, 列傳第八 劍君, 學園出版公社 李民樹 譯(1988). 三國遺事, 券2 第二紀異, 乙酉文化史 (1988). 三國遺事, 券1 第一紀異, 乙酉文化史 김상철 · 김영학(1988). 우리나라 검도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 무도연구소지 제8집 제1호,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나영일(1992). 조선조의 무사체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박선식(1998). 한국검도문화진단, 검도세계9월호, 월간검도세계사 (1999). 배달겨레 도검이야기, 검도세계1월호, 월간검도세계사 (1999). 배달겨레 도검이야기, 검도세계2월호, 월간검도세계사 신채호(1977). 조선상고사下, 삼성문화문고 신호주(1997). 체육사, 명지출판사 최무장 · 임연철 편저(1990). 고구려 벽화 고분, 신선원, pp.464-507 (1997). 근대검도의 모습, 용인대학교 신체문화연구회 검도세미나 洪渟昶(1971). 新羅花郞徒의 硏究, 新羅伽倻文化3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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